글을 시작하기 전 :

 

필자는 영어판 할로우 나이트에서 사용하는 'mind'라는 단어를 '정신'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국판 할로우 나이트에서는 이를 '마음'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마음이라는 단어에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를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고 'mind'라는 단어는 감정보다는 정신 쪽에 더 치우쳐진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마음'보다는 '정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 이 글을 작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신 ㅇㄴ님, ㅎㄹㅎㄹㅋㅌ님, 그리고 이 과정을 지켜봐주시며 격려해주신 ㅇㄷ님께 감사드립니다.

 

++ 19.09.04 >> 'mind'라는 단어를 '생각'에서 '정신'으로 부분 수정.

 

 

 

 

창백의 왕은 왜 그릇을 만들었는가

 

 

 

 

 

할로우 나이트 게임 플레이를 하면서 창백의 왕이 만든 창조물은 헤라와의 계약으로 태어난 호넷과 여사와의 결합으로 태어난 공허의 존재들인 그릇들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창백의 왕(이하 창왕)의 창조물은 이 두가지 종류의 생명체들만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백색 궁전(이하 백궁)을 지키고 있는 친위대 형상들과 날개달린 형상들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친위대형상

 

 

날개달린 형상

 

 

 

이 두 가지 형상들이 어째서 창왕의 창조물인가, 하고 물으면 이유는 간단하다. 백궁에 있는 구역 중 숨겨져 있는 장소 중 하나를 조사하면 친위대 형상과 날개달린 형상의 갑옷들, 그리고 친위대 형상 안에 들어 있는 팔 네 개 달린 공허 존재들을 찍어내는 데에 사용하는 틀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장소가 창왕이 쓰는 곳이 아니라고 우길 수 있지만, 과연 백궁에서 창왕이 아닌 누가 공허를 갖고 생명체를 찍어낼 수 있단 말인가. 여사의 대사로 보아 추측하건대, 그릇을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친위대 형상과 날개달린 형상에 대한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는 오로지 창왕만이 손을 댄 모양이다.

 

 

 

 

잠시 멈추고 광휘가 어떻게 그 힘을 뻗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주인공이 처음 할로우 나이트를 플레이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감염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였으며, 슬라이나 영혼 폭군의 대사를 통해 이 감염이 '꿈'을 통해 퍼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꿈'이라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장로벌레의 지속적인 대사로 꿈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이 꿈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낼 수 있다. 이에 가장 와닿는 예시는 잊혀진 교차로에서 만날 수 있는 마일라로, 수정을 캐어 돈을 벌겠다던 희망을 품고 있던 마일라가 스토리의 흐름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감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광휘가 어떻게 감염된 생명체들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는지 주인공에게 알려준다.

 

 

 

 

 

따라서 광휘의 감염은 곧 '꿈'을 통해 전파되는 것이며, 희망도 곧 감염으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갑자기 왜 광휘 얘기를 꺼냈냐 하면, 지금부터 창왕이 왜 그릇을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발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창왕이 광휘의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광휘를 가둘 공허의 힘이 필요했는데, 꿈을 통해 전파되는 광휘를 막기 위해서라면 꿈을 꿀 수는 있되 꿈을 꾸지 않는 존재가 필요해서 그릇을 만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친위대 형상과 날개달린 형상의 공통점은 창왕이 창조자라는 것, 그리고 안에 공허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중 날개달린 형상은 몽환의 대못으로 칠 때 주어지는 대사가 전혀 없지만, 친위대 형상은 "죽여"나 "방어해" 같은 아주 단순한 생각들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허의 존재들에게 '정신(mind)'과 '의지(will)'가 있음은 게임 내에서 꽤 여러 번 다뤄지곤 했는데, '정신'이 존재한다는 부분은 친위대 형상과 공허의 존재로 추측되는 수집가의 몽환의 대못 대사로, '의지'가 존재한다는 부분은 강철 영혼 진의 대사 중 "그것은 자신만의 의지를 갖고 있어요"라고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몽환의 대못을 각성하면서 나오는 설명 화면의 대사로 "강력하게 보호되어 있는 mind에도 침입할 수 있습니다"라는 것인데, 이 각성된 몽환의 대못을 궁전 터에 있는 친위대 형상을 향해 휘두르면 백궁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친위대 형상은 침입할 수 있는 'mind'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심연의 검은 알을 몽환의 대못으로 칠 때 나오는 기억 속의 대사 중 'No mind to think(생각할 수 있는 '정신'도 없는)'라는 걸 생각하면 몽환의 대못 대사도 존재하지 않는 날개달린 형상에 광휘를 가두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오류가 생긴다. 광휘의 감염은 꿈을 통해 퍼져나가며, 광휘 본인도 공허의 기사를 몽환의 대못으로 칠 때 그의 꿈속으로 진입하여 만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날개달린 형상처럼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가 어떻게 희망을 품을 수 있고, 어떻게 꿈을 꿀 수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창왕은 날개달린 형상보다는 더 복잡한 존재가 필요했으며, 따라서 그다음 단계는 바로 친위대 형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친위대 형상도 아마 창왕에게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아마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다.

 

 

첫 번째, 친위대 형상의 정신은 그렇게 넓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친위대 형상의 몽환의 대못 대사는 딱 두 가지로 나뉜다. "죽여"와 "방어해". 이는 확실히 날개달린 형상에 비하면 발전된 모습이지만, 희망을 품고 꿈을 꿀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 근거로 인게임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백궁을 들고자 한다.

 

백궁은 꿈의 영역에 있으나, 실존하는 장소로 구별되는 기묘한 장소이다. 진입하는 방법은 위에 나열했던 대로 궁전 터에 있는 친위대 형상을 강화된 몽환의 대못으로 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백궁이 꿈꾸는 자들을 몽환의 대못으로 칠 때 나타나는 꿈의 영역과 동등한 꿈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백궁은 이와는 전혀 다른 구역이다.

 

다른 꿈의 영역들을 생각해보자. 한 번 쓰러진 보스를 몽환의 대못으로 칠 때 나오는 꿈의 영역을 예시로 들어볼까. 이러한 꿈의 영역에서 주인공이 죽는다면 현실 세계에서 돈도, 영혼도 무사한 채로 그림자를 남기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깨어난다. 이는 이 구역들이 온전한 '꿈'의 영역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두자. 그렇다면 백궁은 어떠한가? 백궁 역시 죽으면 그림자가 남지 않는다. 그러면 백궁은 역시 온전한 꿈의 영역인가, 라고 하면 그건 아니다. 이유는 강철 영혼 모드 때문이다.

 

 

 

강철 영혼 모드

 

 

강철 영혼 모드는 일반 모드와 무엇이 다른가. 강철 영혼 모드에서는 한 번 죽으면 그림자를 남기고 가장 최근에 앉았던 벤치에서 리젠되는 대신,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 상태로 게임이 리셋되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임플레이다. 하지만 이 모드에서도 죽어도 리셋이 안 되는 곳이 있는데, 그게 바로 꿈의 영역들이다. 강철 영혼 모드에서도 쓰러진 보스를 몽환의 대못으로 쳐서 진입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보스에게 얻어맞아 죽어도 주인공은 영혼과 지오가 무사히 있는 채로 현실 세계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몽환의 대못으로 진입할 수 있는 구역 중에서 한 번 죽으면 실제로 죽어 리셋되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백색 궁전이다. 이는 비록 백색 궁전이 꿈의 영역에 걸쳐져 있으나 실존하는 공간이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왜 백색 궁전은 이러한 형태를 하고 있는가. 필자는 그것이 친위대 형상의 꿈속에 존재하는 구역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에서 주장하였듯이 친위대 형상의 정신은 희망을 품고 꿈을 꿀 정도가 안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친위대 형상 안에 존재하는 백색 궁전이 온전한 꿈의 영역이기에는 불완전한 구역으로 나타나고, 결국 친위대 형상이 갖고 있는 정신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실제 존재하는 구역처럼 강철 영혼 모드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집가가 친위대 형상이라는 가설에서부터 시작된다. 수집가의 외형은 친위대 형상을 죽여 내부의 공허가 드러날 때의 모습과 굉장히 흡사하며, 팔이 네 개 달린 것까지 일치한다. 

 

 

 

친위대형상

 

 

수집가

 

 

사냥꾼의 일지에서 발췌되는 "혼자 이상한 소음을 내며 때때로 동굴을 돌아다니는 그림자. 나는 그것을 똑바로 본 적이 없으므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생명체인지 모른다."라는 말로 이 수집가라는 공허의 존재가 꽤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과연 수집가로 불리는 이 친위대 형상은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는가? 간단한 답은 다른 친위대 형상이 만들어졌을 때부터였겠지만, 더 자세한 답은 눈물의 도시 끝에 있는 사랑의 탑과 그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사랑의 열쇠'를 얻는 곳에서 알 수 있다.

 

'사랑의 열쇠'는 여왕의 정원에 있는 커다란 멋쟁이 껍데기의 품에서 얻을 수 있다. 이 껍데기에 몽환의 대못을 사용하면 특수 대사가 나타난다. "Too long... spent together. We became as one...(너무나도 오래... 같이 보냈어. 우린 하나처럼)". 필자는 이 멋쟁이 껍데기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존재가 수집가라는 공허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멋쟁이 껍데기의 시체를 살펴보면 눈에서 공허를 흘리고 있으며, 심연에 있는 검은 알에 연결된 검은 덩굴손이 이 껍데기에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온전히 필자의 추측이컨데, 수집가라는 존재는 본래 이 멋쟁이 껍데기가 아니었겠느냐고 생각하고 있다. 공허의 존재가 과연 유리병을 만들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위에 서술했던 첫 번째 이유처럼 과연 수집가라고 불리는 공허의 존재에게 애벌레들의 위치가 모두 기록된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탑의 내부가 모두 정신 병원에서 환자의 자해를 막기 위해 벽에 패딩을 댄 듯한 모양인 것도 애벌레를 포함한 살아있는 존재들을 잡아 가두던 수집가(멋쟁이 껍데기)의 과한 집착을 막아두기 위해 있는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친위대 형상이었던 공허의 존재가 이 수집가(멋쟁이 껍데기)를 감시하는 역할로 근처에 있었다가 수집가와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나머지 서로의 정신이 섞여 수집가의 광적인 집착이 공허의 존재인 친위대 형상에게 흘러들어 그에게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이는 수집가(공허의 존재)의 몽환의 대못 대사인 "안전한 공간(A safe place)", 그리고 "보호받을 거야(Protected at last)"가 친위대 형상의 몽환의 대못 기본 대사인 "방어해(Defend)"와 무언가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뿌리가 동일하기 때문에 더 쉽게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친위대 형상은 깊이가 부족한 정신으로 광휘라는 존재를 꿈속에 제대로 담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보호를 목적으로 만든 친위대 형상의 공허는 너무 쉽게 주변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타인의 정신에도 간섭이 가능한 광휘에게 너무 쉽게 휘둘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창왕이 다른 해결책을 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것.

 

 

위에 서술한 광휘를 담기 위해서 꿈을 꿀 수 있지만, 꿈을 꿔서는 안 된다는 말로 다시 돌아가 보자. 공허는 정신과 의지가 있으나, 공허로써 만들어진 존재는 희망을 품고 꿈을 꿀 수 있을 정도의 깊은 사고는 불가능하다. 수집가도 결국에는 타인에게 주입된 생각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창왕은 공허를 담을 수 있되, 일반 벌레처럼 복잡한 사고가 가능하고 희망도 가질 수 있으며, 꿈도 꿀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또한 필자의 가설뿐이지만, "신과 공허로부터 태어나"라고 하는 것을 보아 광휘를 담아야 하는 존재는 빛을 억누르는 힘인 공허(VOID, yours is the power opposed = 공허, 네 힘은 반대되는 힘이다)와 그에 사슬을 채우기 위한 신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신성둥지에 있는 신같은 존재들은 중에 광휘, 웜(=창백한 왕), 그리고 뿌리(=백의 여사) 등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팀체리의 레딧 공식 답변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링크

 

 

 

 

따라서 당연하지만, 창왕이 백의 여사의 도움을 받아 그릇들을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왕의 영혼 부적은 "고귀한 존재들 사이의 연합을 상징"하는 부적이며, 여사의 "There is some shame I feel from my own part in the deed(그 일에 내가 기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부끄러워하고 있다)"라는 대사로 미루어보아 여사는 분명히 그릇을 만드는 데에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백의 여사가 그릇을 자신의 "spawn(자식)"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그 사실을 확고하게 다진다. 따라서 주인공인 기사, 부서진 그릇, 그리고 공허의 기사를 포함한 그릇들은 모두 왕과 여왕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과 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어느 정도 신적인 힘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그 근거로 고귀한 존재들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집중 능력을 순수한 그릇과 주인공인 기사가 모두 쓸 수 있으며, 상식적으로 집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정신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허를 품은 웜과 뿌리의 자식 역시 높은 수준의 사고가 가능했어야 하고, 그에 따라 꿈을 꿀 수 있는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광휘가 퍼뜨리는 감염을 막기 위해서는 꿈을 꿀 수 있지만 꿈을 꾸지 않는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꿈을 꾸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으나 광휘가 파고들어 깨뜨릴 수 있는 의지는 없어야 했기에 순수한 그릇의 조건이 다음과 같이 주어진 것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마음(=mind)도 없고.

깨뜨릴 의지도 없고.

고통을 외칠 목소리도 없다.

 

신과 공허로부터 태어나.

 

그들의 꿈을 괴롭히는 눈부신 빛을 봉인할 것이니.

 

네가 그릇이다.

 

네가 공허의 기사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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