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랐다. 겨울이면 따뜻했고 여름이면 시원했으며, 입을 것도 먹을 것도 항상 손에 닿는 곳에 있는 그것이 내가 누린 풍요였다. 내가 젖먹이일 적부터 나를 돌봐주던 보모는 나를 사랑해줬고, 나 역시 그를 어미처럼 따랐다. 

이유는 당연했다. 내겐 어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2.

아비는 항상 일로 바쁘곤 했다. 집안일을 하는 하인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행정이건, 군사건, 무역이건 - 무려 신이라는 소문이 도는 왕의 대리로서, 이 나라에서 그의 손을 거쳐가지 못한 것은 없다 하였다. 오로지 나만, 나만이 그의 손길을 받지 못할 뿐이었다.

 

3.

그는 집에 있던 적이 없었다. 꼭두새벽에 집에서 나가, 늦은 밤에 모두가 잠든 집 안으로 홀로 도둑고양이처럼 기어들어오곤 했다.

가끔 내 머리 위에 그의 손이 얹어진 적은 있었으나, 나는 그런 그의 존재를 알아채기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으리라.

 

4.

항상 내 상상 속의 그는 우람한 존재였다. 어둠 속을 걱정 없이 헤쳐나가는, 왕국의 모든 일을 손에 쥐고 있는 자. 그런 자가 내 아비라 생각하면 그 이상으로 든든한 자는 없었다.

필히 키도 클테지. 어깨도 다부졌을테지.

 

5. 

나이가 무려 열하고도 다섯이 찬 날이 되어서야 내 탄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내 머리카락처럼 짙은 줄기의 꽃다발을 든 그를 처음으로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어느 무엇도 아니었다.

 

6.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자란 내게 부족한 게 있었다면, 그건 바로 부모의 사랑이었다. 아이가 무엇을 해야 아비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수없이 생각해보며 밤을 설치곤 했다. 부족한 건 학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전투 실력일까. 아무래도 후자임이 분명하지. 그렇지 않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테니.

 

7.

"당장 내려놓거라."

마치 저택에서부터 여기까지 뛰어온 듯이 숨을 몰아쉬며 그가 헐떡였다. 항상 굳건히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떨리는 게, 가지런히 늘어져 있던 눈썹이 불안에 모여진 게 퍽이나 생소했다.

"당장."

다시는, 검을 손에 쥐지 않겠습니다.

그런 맹세까지 하게끔 하면서.

 

8.

반항기였을까. 반항기였다. 아비에게 거부당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성정이 몹쓸어졌다. 보이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고, 하인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잘 하는 걸로 관심을 받지 못한다면 못난 것으로 받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참 한낯 어린아이같은 투정이었다. 그 때의 내게는 참 절실했지만.

 

9. 

"당신에게 쓸모 없고 싶지 않았어."

벼랑 끝에 다다른 그 감정의 결말은 애정을 갈구하는 하소연. 그제서야 썩어가는 동앗줄을 붙잡으며 살려달라고 애처롭게 우는 자식이 눈에 들어왔을까. 두 손에 제 얼굴을 파묻으며 나를 끝까지 외면하려는가 싶었던 찰나,

 

10.

"네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했다."

죄책감에 서린 고백만이 부서진 다리를 지탱하려 애쓸 뿐이었다.

 

 

 


 

 

 

0.

적이 많은 자는 편히 쉬질 못하고, 그것은 신의 대리라고도 불리는 공작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이었다. 왕가에 충성하던 한 기사와 사랑에 빠진 그는 머지않아 그녀와 혼인하였고, 아이를 출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새 공작부인은 제 아이만을 살리고 그를 습격한 자객들과 함께 절명했다.

그렇게 다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00.

내 탓이다. 내가 죽인 것과 무엇이 다르냐. 장례식이 끝나고서도 뿌리 내린 듯이 묘비 앞을 한참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공작이 움직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는 보모의 보고 때문이었다.

 

000.

공작처는 저택을 지키는 기사를 늘렸다. 아이가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도록 충성심이 강한 하인들을 선별하였다. 집에 붙어있는 일이 없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는 그를 귀족들은 비웃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 비록 이스마는 잃었어도 너 하나만은 지켜야겠으니.

 

0000.

너무 뛰어난 교사를 붙이지는 않았다. 학문에 특출나면 그건 그대로 적이 생길테니까. 검술 선생은 커녕, 검조차도 쥐지 못하게 하였다. 제 어미가 칼에 찔려 죽었는데, 아이마저도 그 길을 따라갈테니까.

 

00000.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배제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라고 묻는 보모의 질문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 자신마저도 배제했다. 자신이 근처에 있으면 아이에게 해가 갈까 일부러 그 근처에 가지 않았다. 그래야 지킨다.

이번에는 지켜야만 한다.

 

000000.

핑계지.

모두 제 자식을 내팽개친, 아비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한 졸렬한 이의 핑계일 뿐이었다.

 

0000000.

"저는 공작님이 필요합니다."

그 당돌한 눈빛을 어찌 잊을까. 늦은 밤에 술잔을 기울이면 떠오르는 그 웃음이, 그 사랑이. 나를 필요로 했기에 제 목숨을 빼앗긴 하나 뿐인 사람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은 필히 술기운임이 분명했으리라.

 

00000000.

그러니, 너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그 부서진 다리를 지탱하는 유일한 죄책감이었다.

 

 

 

2020.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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